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네덜란드

여행하는 동안 동성 커플을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람들 시선에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애정 표현을 하는 그들을 볼 때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여행이 길어질수록 나도 여유가 생겼다. 세계여행 초반, 칸쿤 해변에서 진한 입맞춤을 하는 레즈비언 커플을 보고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당황했던 내가 8개월 뒤 토론토 도심에서 손잡고 걸어가는 게이 커플을 보고 그 패션 감각을 칭찬하기에 이른 것이다.

풍차의 나라 네덜란드, 벨기에에서 네덜란드로 국경을 넘자마자 풍차가 우리를 맞이했다

네덜란드를 여행할 때는 의도치 않게 레즈비언 커플의 에어비앤비에 묵게 됐다. 남편은 위치와 가격을 고려해 암스테르담 외곽 부섬(Bussum)의 숙소를 별 생각 없이 예약했지만 대프너와 린다라는 이름을 가진 프로필 사진 속 두 여성에게서 나는 연인의 기류를 느꼈다. 숙소에 도착해보니 역시 내 짐작이 맞았다. 작은 아파트 벽면 곳곳에 그들의 역사를 보여주는 애정 가득한 사진이 걸려 있었다. 대프너는 키가 크고 쾌활했고 여행을 좋아하는 린다는 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친다고 했다. 대프너와 린다는 영어 이름 대신 한국어 발음 그대로 진짜 우리 이름을 알고 싶어 했다. 어눌한 발음이지만 ‘근영’과 ‘병대’를 발음하려 노력하는 그들이 고마웠다.

우리가 빌린 방에는 어메너티, 티백, 여행 가이드북 등 손님을 배려한 물건과 아기자기한 소품이 많았다. 집안 곳곳에 따뜻함과 섬세함이 흘렀고 나는 묘한 부러움을 느꼈다. 신혼이고 장기 여행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참작하더라도 여행 동안 남편과 나는 참 많이도 다퉜다.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고 조율하는 과정이 참으로 힘겨웠고 때로는 ‘그’라는 존재가 전혀 이해 불가로만 여겨졌다. 그런데 집안 분위기만 봐도 이들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오빠, 아무래도 나 여자를 만나 결혼할 걸 그랬나 봐.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어!”라고 했더니 남편은 “지금도 늦지 않았어!”라고 응수했다.

대프너와 린다 그리고 우리는 와인에 얽힌 재밌는 추억이 있다. 그들의 집에 온 둘째 날, 풍차 마을 잔서스한스(Zaanse Schans)와 해자로 둘러싸인 도시 나르던(Naarden)을 구경하고 돌아와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새우 오일 파스타를 만들어 프랑스에서 사온 화이트 와인과 같이 먹을 예정이었다. 드디어 완성된 요리를 맛보는 행복한 순간, 차가운 화이트 와인의 풍미에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자연스럽게 와인 라벨을 살피는데 이게 웬걸! 우리가 산 와인이 아니었다. 새우를 볶느라 정신없던 나는 ‘이 와인이 맞냐’고 물어보는 남편에게 건성으로 ‘응’이라고 대답해버린 것이다. “유럽이니까 마트에 와인은 많을 거야. 일단 먹고 내일 똑같은 와인으로 사다 놓자”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평소 대범한 성격의 남편이 이날은 웬일인지 집주인에게 너무 미안하다며 밥도 못 먹고 안절부절못했다. 결국 우리는 저녁을 먹다 말고 거실에 있는 린다에게 가 이실직고했다.

문제의 와인! 너무 맛있어서 나중에 이 와인의 생산지 프랑스 낭트를 찾아가기도 했다

“린다. 정말 미안한데 우리가 실수로 너희 와인을 마셨어. 우리 것인 줄 착각했나 봐.”

“와인 맛있었니?

”응? 응! 정말 맛있더라.”

“에어비앤비를 하다 보면 종종 있는 일이야. 너희가 맛있게 마셨으면 그걸로 충분해. 걱정 마!”

마침 밖에서 돌아온 대프너에게도 상황 설명을 하고 미안하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 와인은 대프너의 것이었다. 그녀는 “당연히 미안해야지! 그거 우리 엄마가 프랑스 여행 갔다가 사 온 건데!”라고 목소리를 높여 장난스럽게 말하다가 이내 농담이라고 정말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마음 넓은 집주인 덕분에 그날 일은 그렇게 해프닝으로 마무리되었지만 미안한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우리는 다음 날 일정을 바꿔 점심때 두 사람에게 한식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어느덧 여행 9개월째인 우리는 간장, 고추장, 참기름까지 웬만한 한식 양념은 다 가지고 다녔고 현지 식재료를 이용해서 한식 만들기도 제법 잘했다.

대프너 그리고 린다와 한식 타임

두 사람에게 대접할 음식은 파전과 제육볶음이었다. 파전에는 다른 해물 대신 새우를 넣었고 제육볶음은 맵지 않게 만들어 상추와 함께 내었다. 대프너와 린다는 한국 음식엔 채소가 많이 들어가 건강에 좋을 것 같다며 서툰 젓가락질로도 맛있게 먹었다. 이번엔 우리가 사 온 화이트 와인도 함께 마셨다. 낮술도 한 터라 기분 좋게 알딸딸해진 우리는 고흐미술관에 가기로 한 계획을 취소하고 집 앞 잔디밭에 앉아 일광욕을 즐겼다. 술이 좀 깨자 대프너에게 자전거를 빌려 근처 공원에 갔다. 돗자리도 없이 공원 나무 아래 앉아 여행의 우연성에 대해 생각했다. 우연한 사고가 불러온, 계획대로 되지 않은 여행은 항상 더 큰 추억이 되는 법이다. 그렇게 네덜란드에 머문 5일 중 그날이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이 되었다.

어느덧 네덜란드를 떠나 독일로 가는 날이 되었다. 아침부터 어디선가 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집을 나설 때 눈치로는 대프너와 린다가 다툼이 있었던 것 같았다. “아! 역시 세상에 갈등 없는 커플은 없구나!” 올 때와는 다른 묘한 위안을 받으며 재밌는 추억을 안고 다음 여행지로 향했다.

네덜란드는 자전거의 나라다 남녀노소 누구나 복잡한 암스테르담 시내에서도 자전거를 애용한다

우리가 머문 Bussum의 공원, 잘 만들어진 공원이 아닌 야생 국립공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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